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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알아보자

메이지유신으로 많은 위업을 이룬 지사


사카모토 료마(1835~1867년)는 에도시대 말기의 도사번 출신 지사이다.
도사번을 탈번한 후 가쓰미슈의 사상에 공명하고 고베 해군조련소 설립에 분주하며 항해술을 배웠다.
카메야마 사중을 창설해, 해운·상사·군사 지원을 일체화한 사업을 전개한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키도 다카히로의 회합을 실현하여 사쓰초 동맹을 성공시키고, 선중팔책을 번주산 내용당에 제출하여 대정봉환의 건백을 단행하였다.

 

도사를 탈번함


료마는 부시 반평태라존왕 양이파의 토사하급 번사를 중심으로 한 도사근왕당(도사금농당)에 참여한다.
그러나 후에 사상의 차이 때문인지 용마는 탈번을 결심한다.
강호를 향한 용마는 개명적 사상을 가진 막신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승해주를 방문한다.
해주의 생각에 끌린 용마는 그대로 문하생이다.

 

승해주와의 만남


용마는 승해주와의 만남에 대한 기쁨을 편지로 누이에게 전하고 있다.
편지에는"일본제일의인물,카츠린타로(海船)라는사람의제자가되어""조금에헨얼굴을하고몰래내려오시겠사오니,에헨,에헨"이라고적혀있다.
에헨과 득의양양하게 말하고 있으며, 이 무렵부터 용마는 양이론에서 개국론으로 사상이 일변한 것으로 보인다.

 

유연한 사고력으로 많은 사람의 의견을 하나로


료마는 유연한 사고력을 지녔고, 그 솔직한 표현력은 '맞으면 어쩐지 끌린다'고 당시 평가받았으며,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기와 같은 서로 속마음을 떠보는 상황에서는 협력적인 무기였다.
가쓰미슈는 료마노코의 재능을 알고 있었는지 고베 해군조련소 개설을 위한 협상역으로 각처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류마는 여러 주요 인사들을 만나면서 당시의 첨단 사상을 언급했다.
이러한 경험이 나중에 그가 고안한 신국가체제론 '선중팔책'에 활용되었을 것이다.

 

무역 상사 카메야마사중


이윽고, 막정의 변화에 의해 카츠미주는 좌천되어 버려, 해군 조련소가 폐쇄되어 버린다.
탈번 낭사인 료마는 사쓰마번에 맡겨지게 되었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용마에게는 호기가 되었으며, 지원을 받아 나가사키에 카메야마 사중을 개설한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서 조슈번과도 접촉하는 가운데 사쓰초의 군사동맹 중개역에 나섰다.

 

교묘한 교섭으로 사츠조 동맹


사쓰나가 양번은 막부와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대립 관계로부터, 서로 좀처럼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원한은 접어두고 화제로 돌리지 않고 공통된 이익을 논한다는 전략으로 사쓰초동맹을 성공시켰다.
확실한 전략이 뒷받침되는 협상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새 시대를 보는 일 없이 힘이 다하다

 


료마는 사쓰초 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막신들의 표적이 된다.
테라다야에서 막리에게 습격당해, 오른팔에 큰 상처를 입고, 요양에 들어가기 위해, 큐슈에 몸을 의지한다.
이후 료마는 여러 번의 연합정권을 수립하는 공의정체론 '선중팔책船中八八'을 초안한다.
토사번주의 산내용당에 이를 제출함으로써 장군 덕천경희에게 건백하고 대정봉환을 실현시켰다.
대정봉환을 성사시킴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체에 노출된 료마는 1867년 11월 교토의 오미야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향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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