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대는 일본 역사의 한 구분의 하나로 헤이조쿄(지금의 나라현)에 도읍이 있었던 시대이다. 헤이조시대라고도 한다. 불교 진호국가를 지향하여 덴페이 문화가 꽃핀 시대이다.
후지와라 후 히토와 헤이죠쿄 천도
대화의 개혁을 단행한 나카 토미노 카마 타리는 후지와라 씨의 시조이다. 가마 타리는 죽음의 전날 덴지 천황보다 후지와라 성과 대신의 지위를 주는 것이고 뒤의 후지와라 씨의 지위를 쌓은 것이다.
가마 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 후 히토는 우대신으로 조정하고 정치를 하고 있다.
서기 710년 인구 증가에 따른 후지와라쿄가 비좁게 되므로 후 히토는 헤이죠쿄 천도가 하지만, 이것은 야마토 왕권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 히토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때문에 천황과 외척 관계를 구축하는 일에도 주력하고 있다.
후 히토는 딸 미야코가 몬무 천황의 황후로 하고 문무 천황의 아들 수황자(사람의 왕자:쇼무 천황)에게도 딸의 광명을 자식 시집 보낸 것이다.
이렇게 후지와라가의 번영을 기틀을 다진 후 히토는 720년에 승하하였다.
후 히토의 사후 정치권의 방향을 잡은 것은 덴무 천황의 손자인 나가야 왕이다. 나가야 왕은 후 히토의 사후에 좌대신에 승진하고 있지만 그 권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729년 주택 왕의 변에서 후 히토의 아이들인 후지와라 네 형제의 책략에 의해서, 자해에 밀리고 말았던 것이다.
쇼무 천황이 국분사·대불을 세우다
후지와라 4형제는 권력을 한 손으로 장악할 수 있었지만 곧 국내에서 천연두가 유행하고 만다.
이는 연립 주택왕의 재앙으로 여겨져 737년 후지와라 4형제는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후지와라 씨의 기세가 수그러들자, 다음은 타치바나 요시비 씨가 정권을 잡자, 이에 반발한 규슈 다자이부의 후지와라 히로츠구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황이었던 쇼무천황은 혼돈되는 세상을 부처의 힘으로 다스리기로 결심한다.
전국 각지에 국분사를 지어 대불조립 조칙을 내린 것이다.(그 동안 4년 반 정도 동안 성무는 천도를 거듭했다.)
대불 완성 후 성무천황은 승하하였다.
공지 공민제의 붕괴
다이호 율령과 반전 수수 법에 의해서, 농민에게 논이 대시여에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사람들에게 최저한의 생활이 보장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세 등의 중세나 노역 의무의 부담, 무엇보다 끝까지 빌린 땅으로 아무리 갈고도 땅을 후손에게 유세지 않는 등의 불만으로 도피하거나 귀족이나 호족들의 부하로 들어가다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개의 땅을 개척함과 자손 삼대에 걸쳐서 그 땅이 사유할 수 있는 삼세 일신 법(학교 일심의 편)이 723년에 성립한 것이다.
이로써 새로운 토지의 개간이 진척되다, 논이 늘어 더 생활이 넉넉해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삼대째인 손자 대의 뒤에는 나라에 땅을 내놓아야 하는 때문에 사유 기한이 다가오자 농민들은 토지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이 있었다.
간전 영년 사재 법
743년 토지의 무기한 사유를 허용하는 간전 영년 사재 법이 성립했다. 현재는 곳의 민중의 사유 재산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는 단지 삼세 일신 법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땅의 포기를 방지하기 때문뿐 아니라 더 개간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연공에 의한 징세를 비대화시킬 목적도 있었다.
토지 사유를 인정하는 것이고 모든 땅을 국가의 것이라며 공지 공민제는 붕괴됐다.
유력자들은 자신의 토지 개간에 주력했으며 그 때문에 일반 농민까지도 사용하고 개간을 진행하여 원래 농민들이 소유했던 논이 황폐된다.
귀족이나 호족들은 그런 땅을 모아 초기의 장원이 되는 것이었다.
헤이안쿄로의 천도
임진왜란 100여 년 뒤 덴무천황계 일왕의 대세가 이어졌는데, 여제가 잇달아 왕위를 둘러싼 음모가 끊이지 않자 후지와라 씨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지와라 모모카와는 덴무천황의 형이었던 덴지천황계로 전환하기 위해 히카리천황을 옹립하였다.그리고 광인천황의 아들인 간무천황이 다음에 왕으로 즉위한 후 평안경으로의 천도를 이룬 것이다.
환무가 막 즉위한 무렵에는 매우 정권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정치 관여를 획책하는 승려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단 나가오카경(長岡京)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 천도는 비밀리에 이뤄져 많은 귀족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나가오카경의 조영 책임자였던 후지와라 다네쓰구(藤原種継)가 반대파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더욱이 동생인 사와라 신왕이 종계암살의 관여가 의심되고, 사와라 친왕은 금식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후 간무천황의 어머니와 왕후가 잇달아 죽는다.동생의 재앙을 두려워한 환무는 장강경에서 다시 천도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794년 평안경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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