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는 서기 794년부터 1185년까지의 시대를 가리키며, 간무천황이 현재의 교토부에 헤이안쿄(平安京)를 세우고 도읍을 옮긴 후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할 때까지 약 390년간에 걸쳐 일어난 일입니다. 교토에 있었던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될 때까지 정치적으로 유일한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헤이안 시대라고 칭합니다.
황족 이외 최초의 섭정 후지와라 씨
헤이안쿄 천도가 이루어진 후 한때 쇠퇴했던 후지와라씨의 세력은 북가 후지와라 후유츠구가 실권을 잡으면서 다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유츠구와 그 아이인 료후는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냄으로써 황족과의 외척 관계를 구축해 갔습니다.
더욱이 료후는, 황태자인 츠네사다 신왕(츠네사다 신왕)의 부하가 모반을 기획하고 있었다고 해서 체포해, 츠네사다 신왕을 폐지하는 것으로, 후유츠구의 딸의 아이를 문덕 천황으로서 즉위시켰던 것입니다.
또, 응텐몬 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정적이었던 반젠오(토모요시오)를 실각시켰고, 료후는 젊은 키요카즈천황을 대신해 정치를 하기 위해, 황족 이외의 첫 섭정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후지와라 기타가에 의한 인신 섭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관백의 탄생
양방의 뒤를 이은 양자인 기경은 광효천황으로부터 사실상 첫 관백을 받았습니다.
※ 엄밀히 말하면 이 시기에는 아직 관백이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경이 죽은 후 다음 우타 천황은 관백을 두지 않고 스스로 정무를 맡았다.
스가와라미치마코토사셍
이 무렵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뛰어난 학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타 천황에게 매우 귀중하게 여겨져, 학자의 태생이면서, 우대신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기경의 아들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는 억울한 죄를 받고 치쿠젠코쿠(筑前國)의 다자이후(太在府)로 좌천되었습니다.
후지와라씨가 섭정 독점
다이고 천황(다이고 천황)은 섭정·관백 없이 스스로 정치를 펴는 친정을 펼쳤다. 다음으로는 다이고 천황이 양위하고 주작 천황이 즉위하자 후지와라 다다히라가 섭정했습니다. 그 다음 무라카미 천황은 다시 친정을 실시하지만, 이후로는 츄헤이 후손들 후지와라 일족이 섭정 자리를 독점해 나가게 됩니다.
969년에는 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좌대신 겐다카아케가 후지와라 씨의 음모에 의해 다자이후로 추방되자 이후 후지와라 씨에게 적은 없어진 것입니다.
후지와라씨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습니까?
도장이 씨부자가 되다
후지와라씨의 정적이 없어진 이후는, 후지와라 일족내에서 「우지장자」라고 불리는 후지와라 일족내에서의 권력 투쟁이 행해져 갑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 '후지와라 미치나가'였습니다. 도장의 네 딸이 천황의 황후가 된 것으로 후지와라 씨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도장은 출가하여 1027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방의 통치는 소홀했습니다.
무사의 반란
후지와라씨가 셋칸정치를 큰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시대는, 도의 상급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있고, 귀족층의 가문도 고정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작천황(930~946년)대에 관동지역에서 '平将門의 난'이 발발하였습니다. 더욱이 도장의 죽음 다음해에 평충상의 난이 일어나고, 그 20여년 후에는 전구년합전이 발발하여 점차 조정과 귀족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헤이쇼몬이 반란을 일으켰던 관동지역에서는 장원의 확대 등으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방통치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치안이 문란해지기 시작하다
후지와라 일족들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는 권력투쟁에 몰두한 나머지 지방정치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특히 1019년에 일어난 '도이의 입구'라 일컬어지는 여진족이 규슈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도 조정은 무관여하여 현지 국사들에게 맡겨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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